잠들기 위한 하루

 

여자의 하루는 잠을 깨기 위한 몸부림으로 시작된다. 끈적거리며 몸을 잡아 끄는 수렁 같은 잠에 빠져 있던 여자는 휴대폰 알람이 귓전을 때릴 때마다 생경한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3년째 같은 알람벨이다. 용수철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어도 잠이 깨진 않는다. 알람을 누르고도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한참동안 얼굴을 베게에서 떼지 못하고 엎어져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아침을 만들어 먹이고 나갈 사람 모두 내보내고 나면 갑작스레 찾아온 정적이 낯설다. 순간 여자는 고장 난 나침반 바늘처럼 힘없이 집안을 한바퀴 돌다 식탁 위 벽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 곳엔 아무것도 없다. 집을 환하게 보일 요량으로 무늬 없는 흰 벽지를 바른데다 어떤 장식물도 걸지 않아 황량하기 그지없지만 여자는 그 곳에 볼 것들이 아주 많다는 듯이 오랫동안 쏘아보고 있다. 사실 여자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다. 생각하기 위한 멈춤일 뿐이다. 어느 순간 어둠속에서 불이 탁 켜진 것처럼 여자는 할 일을 생각해낸다. 정적을 밀어낼 텔레비전을 튼다. 소음을 만들어낼 세탁기를 돌린다. 갑자기 집안은 활기를 띠고 여자는 세탁기에 세제를 넣다말고 오늘이 납부마감일인 고지서가 있음을 떠올린다. 잊기 전에 고지서를 냉장고에 붙여 놓는다. 여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종종 잊어버린다. 고지서도, 해야 할 일도...... 꼭 해야 할 일은 적어 냉장고에 붙여 두어야 한다.

 

찌르릉 찌르 찌르

 

핸드폰이 울려댄다. 원고 청탁 전화다. 핸드폰에 번호가 뜬 순간 여자는 거절하기로 마음먹는다.

 

일이 많아서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연락주세요...

 

여자는 다음 이라는 말에 자신이 없다. 냉장고에 써 놔야 할 것들이 많아지는 게 싫다. 어느새 점심시간이고 아침도 먹지 않은 뱃속은 알람소리처럼 배고픔을 알린다. 여자는 물만 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싶다. 뱃속의 요동을 멈추기 위해 사과 1개를 껍질 채 먹는다. 껍질 까먹는 것도 번거로워 여자는 껍질 채 먹을 수 있는 유기농 매장 사과만 산다. 씻지도 않고 먹는 날도 있다.

 

엄마

 

아이가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여자는 존재가치를 증명 받아 기쁘다는 표정으로 아이를 돌아본다. 여자는 꽤 다정한 엄마다. 아이가 행복한 지 마음을 쓰고 아이가 재잘거리는 사소한 일들을 유심히 들어준다. 표정도 행복하다. 아이가 다른 일에 신경 쓰면 여자는 표정을 거두고 아이가 먹을 간식거리를 만든다. 부엌에 있는 동안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 냄비나 밥 그릇같은 무생물이어서 다행이다. 여자가 어떤 표정이든 가타부타 말이 없을테니......

식구들이 모여드는 저녁이 되면 여자는 앉을 사이도, 흰 벽을 바라볼 틈도 없다. 음식을 준비하고 편안한 웃음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집을 정리하고 사랑한다 말해주고...... 그들이 모두 잠든 후에야 여자는 가장 어울리는 표정을 짓는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무표정. 여자의 무표정과 여자가 쏘아보고 있는 식탁 위 흰 벽은 닮았다. 무엇이라도 걸어놓거나 그리거나 만들어 낼 수 있는 빈 공간. 하지만 어디서부터 그려야 할 지, 어디에 걸어야 할 지 가늠하기 어려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배타적인 것.

텅 빈 벽을 쏘아보고 있던 여자에게 느닷없는 잠이 몰려온다. 부질없는 행복도, 그릇된 희망도, 가슴을 조여드는 어떤 결정도 침범할 수 없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잠. 여자는 그 잠을 자기 위해 오늘 하루를 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