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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정남영 선생님의 <자본과 그 한계> 2강에서는 앞서 배운 1강을 마무리하고,
새로 2강으로 들어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자본의 한계, 자기 지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끝나고는 즐거운 뒷풀이 타임도~♪ XD
글솜씨가 없어서, 이번에도 강좌 요약본으로 강좌후기를 대신해봅니다.^^*
1강 마무리 하기
맑스는 자본을 두가지 속성으로 보았다. 하나는 부의 일반적 형식으로, 다른 하나는 자본가들의 전유(착취)물로. 부의 일반적 형식이라는 것은, 자본 내부의 잠재적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현실의 자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으로서의 자본을 뜻한다. 자본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추상된 형태, 즉 보편성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렇게 자본이 보편성을 지향하는 과정에서는 장벽들이 존재하고, 매순간 자본은 이 장벽들의 돌파를 자신의 목적으로 삼게 되는데,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자기자신의 장벽이 되는 현상에 직면한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자본의 자기지양이다. 자본의 자기지양은 이윤(c)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자본은 항상 보편성을 추구하며 자기 증식하는 것이 자신의 속성인데, 어느 지점 이후부터는 생산력이 몇 배로 증가한다고해도 이윤율은 저하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것이 맑스가 지적하는 자본의 자기모순이며, 여기서 자본이 수행하는 자본의 자기지양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신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2강-생산과정과 자본의 한계> : 자본의 자기 한계, 그리고 맑스의 방법론
여기서부터는 1강에서 개괄한 자본의 자기 모순, 자기지양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숙지하여야 한다. 필요노동은 임금과 동일시되는 부분으로, 이윤이 생성되지 않는 부분, 즉 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임금을 받은만큼 일하는 시간이다. 잉여노동 시간은, 여기에 대하여 "대상화된" 노동인데, 그것은 잉여노동시간이 절대적인 시간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측정된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절대적인 노동 시간의 증가는 노동 재생산 시간으로 인하여 매우 한정되어 있고, 또한 그것으로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엄청난 반감에 직면하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하며, 사실상 잉여노동의 증가는 고정된 시간 안에서 필요노동과의 상대치로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상대적 비율 사이에서, 만약 생산력이 증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산력이 증가한다면, 평상시의 배로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므로 (1) 필요노동시간(임금분)은 감소하게 된다. (2) 그렇다면 기존의 필요노동시간이 점하고 있었던 비율의 한 부분이 공백 상태로 되는 것인데, 이 공백 상태의 이윤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가 가져가게 된다. (3) 즉, 자본가가 착취하는 잉여노동분이 기존 필요노동시간분의 감소량만큼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 잉요노동분은 기존 필요노동시간의 감소량만큼 증가하게 된다는 것. 여기에서 이윤율을 계산하는 공식이 등장한다. 노동일 전체에서 1/2이 필요노동, 1/2이 잉여노동인 상태에서, 생산력이 두 배 증가했다면, 동일한 임금으로 두 배의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므로, 사실상 임금은 1/2로 줄어든다. 즉, 1/2 나누기 2가 되어, 필요노동은 1/4로 감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요노동이 차지하고 있던 1/2이 1/4로 줄어들었으니, 나머지 1/4은 어디로 귀속되는가? 앞서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의 몫으로 포섭된다. 그러므로 잉여노동은 1/2 더하기 1/4, 즉, 3/4가 된다.
그렇다면 보자. 분명 이윤은 1/2에서 3/4로 증가했다. 하지만 생산력이 두 배 증가한 것에 비해, 잉여노동은 고작 1/4정도만 증가한 셈이 된다. 자본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서 도출된다. 노동자에게 아예 임금을 주지 않는다면 몰라도, 임금을 주어야 하는 한에서는 생산력을 몇 배로 증강한들, 생산력과 동일하게 이윤이 증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윤율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일 것이다. 1/4과 3/4의 비율을 각각 차지하고 있는 현 상태에서 또 다시 생산력이 두 배 증가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필요노동은 1/4 곱하기 1/2, 즉 1/8이 될 것이고, 여기에서 잉여노동은 3/4 더하기 1/8로, 7/8이 되는데 절대적인 이윤은 늘었지만 이윤율이 1/4에서 1/8으로 줄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이윤율이 감소한 셈이 된다. 즉 필요노동이 감소되면 감소될수록, 절대적인 이윤의 양과 상관없이, 이윤율은 획기적인 기술을 투입하여 몇 백만 배의 생산력 증강을 이룩해내지 않는 한, 이윤율을 증가 추세로 올려내기는 힘든 것이다.
결국 잉여가치는 전체 노동일과 필요노동시간의 비율에 상응한다. 이에 따라 볼 때, 신자유주의가 도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생산력의 증강으로는 도저히 이윤율을 이루어낼 수 없으니, 결과적으로는 생산하지 않고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증식제, 즉 생산을 통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식시키는 것은 한편으로, 자본의 본질적 속성이다. 즉 이러한 자본의 한계 속에서 자본은 스스로의 속성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지양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그것이 바로 자본의 자기지양이며, 지금 상태에서 나타나는 신자유주의다.
그러나 맑스는 한편으로는, 이러한 자신의 논리에 주석을 다는데, 그것은 이러한 속성들은 바로 자본의 추상을 통하여 도출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렇게 추상을 통해 도출된 자본의 속성은 다시 actual로 도입되어야 한다. 즉 이러한 virtual 속의 자본은, actual 안에 들어오면서 다른 여러 요소들과 맞닥뜨리게 되고, 이 안에서 또 다른, 변화의 모습들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맑스의 방법론이다. 추상 속에서 법칙을 찾아내어, 다시 현상 속으로 들어와 해당의 법칙을 여러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이 분석하는. 그리고 이 안에서만이 '자본'이 연구될 수 있는 것이다.